“종로 똥 다 내 똥”
쓰레기차(줄여서 배설물차라고도 함)를 걷거나 운전하면서 볼 때마다 그가 웃으면서 한 말이 머리에 박히다가 결국 웃음으로 나왔다.
펜션은 안주인이 공식적으로 한가했기 때문에 주말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냉장고 속 반찬과 밥그릇 속 밥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냉장고에 있는 배추김치와 식탁 위의 김, 계란 후라이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평평한 마당을 가로질러 철계단으로 연결된 2층의 작은 방에서 다시 잠을 잤습니다.
시험이 끝난 밤과 친구들과의 잡담 때문에 조금 더 자야 했다.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를 깨운 것은 중학교 3학년인 주인집의 막내 아들의 소리였다.
처남은 순대와 김밥을 사다가 주인 사모님에게 같이 밥 먹으러 오라고 하자 힘껏 뛰었다고 한다.
기숙생 6명 중 저와 정비사 2명만 1학년 때 대구에서 떨어졌습니다.
원탁에 둘러앉은 하숙인은 주인 사모님, 중학생 아들, 시집가는 큰딸, 그리고 큰딸의 사랑스러운 남편이 수시로 들르곤 했다.
그는 매우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넓고 네모난 어깨, 네모난 얼굴, 날카롭게 생긴 턱수염에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그는 늘 농담을 던지다가 하숙인에게 “종로 똥은 다 내 똥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집주인의 아내는 사위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치며 나를 포함한 하숙인들에게 사위가 사업을 정말 잘한다고 농담을 했다.
그만 얘기하라는 펜션 맏딸 부부의 말을 무시하고 서울이든 누구든 시골 유학생들에게 종로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똥을 모으기 위해 시골에 왔다며 빨리 졸업하고 창업을 하라고 촉구했다.
나는 말로 끝내곤 했다.
2년 후 제가 하숙집을 나왔을 때 제 “형제”도 매우 슬퍼하며 같은 요청을 여러 번 했습니다.
30년이 흘렀습니다.
똥차가 달리는 걸 볼 때마다 처남이 만들어준 ‘내 똥’ 이야기가 떠오른다.
20대 초반만 해도 이야기가 흥미로웠지만 인생의 험난한 풍파를 이겨내고 작은 중년의 역에 도착한 지금 돌이켜보면 그 씩씩한 남자는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은 농담처럼 들렸다.
물론 어린 학생들을 위한 농담일 수도 있고, 성취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보이지 않는 충고일 수도 있다.
그 말이 오늘 유난히 크게 울려퍼졌다.
나는 내 자리를 돌아보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그때를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앞에 형편없는 차를보고 부드럽게 비명을 지른다.
‘이 마을의 모든 똥은 내 똥이야!
’